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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

정주원_작업 스테이트먼트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의 미래를 스스로 점치곤 했다. 남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하는 혼자만의 놀이였지만 나름의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자동차의 번호판 숫자 네 자리 중에 연속되는 숫자가 세 개 이상 이거나 똑같은 숫자가 두 개 이상이면 오늘의 운세가 좋다고 믿는 식이었다. 가끔씩 같은 숫자 4개가 반복되는 번호판을 본 날에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자동차 번호판뿐 만 아니라 서랍장 물건들의 위치 변화라든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상의 현상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철석같이 믿곤 했다.
이런 자의적인 서사 만들기는 지금도 작업으로써 계속된다. 나의 작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사적인 이야기의 궤적처럼 보인다. 그 서사를 이루는 파편들이 임의적으로 수집됐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리되지 않은 진열장이라 할 수도 있다. 진열장에 있는 물건들이 언제나 흩어질 수 있듯이, 나의 작업 속의 구성요소들은 흩어지기도 하고, 따로 있다가 또 뭉치기도 한다. 어떤 그림의 이미지는 다른 그림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내밀한 서사는 보편적인 잣대로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타인에게는 무의미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항상 동반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서사가 단단해지면 분명 바깥의 서사와도 맞닿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이미지들을 마주치게 된다.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우리를 스쳐가고 길게 머무르지 않는다. 또한, 지금은 이미지의 원형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복사본들만이 존재하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런 이미지들은 점점 무게를 잃어가며 가벼워진다. 무게를 잃은 이미지들은 부유하고 떠돌아다닌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화면 속에 잡아두려는 시도들이다. 나는 이러한 시각적 파편들을 수집하고 화면 안에서 재배열한다. 이것은 내가 이미지를 인식하고 머릿속에 기억하는 방식을 시각화한 것이기도 하다. 흐릿한 과거의 단편적인 잔상일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고민일 수도, 혹은 어저께 길에서 보았던 풍경일 수도 있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작고 사소한 것들에 관심이 있다. 부유하고, 떠돌아다니는, 그리고 움직이는 것들; 길의 잡초들, 광고용 풍선,아스팔트 바닥의 질감, 그리고 추상적인 모양들과 나에게로 떠오르는 단어들과 글자들.
일단은 일상의 파편들을 무작위적으로 수집하고자 하지만 사실 그 파편들이 완벽하게 무작위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최대한 그때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반영하려고 한다. 나에게는 어떤 이미지를 수집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일단 그것이 그려지고 나서야 내가 이것에 왜 끌렸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나의 작업은 주로 백토와 같이 두껍지만 번들거리지 않는 재료로 표현된다. 광택이 없고 말갛고 빛 바랜 그 그림들은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희미하고 어스름해 금방 사라질 듯 보이기도 한다. 실체가 아니라 허상처럼, 혹은 원본이 아니라 탁본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런 이미지들은 감지할 수 있지만 또렷이 잡히지 않는 것들을 시각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것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