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Koo | 코리안 그루브 – 유연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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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그루브 – 유연한 몸부림

유연한 몸부림- 주체로서 존재하는 방식

글: 이빛나

작가 박승원(의 작업)은 유연하다. 이때 유연함이란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있어서 현실에서 통용되는 언어/규범/질서를 따르기보다 그것을 절묘하게 분산시키고 유쾌하게 교란시키며 예상치 못한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힘을 지칭한다. 그런 면에서 박승원의 작업에서 생성되는 모든 말과 소리, 형상과 움직임은 해석의 대상이 되길 거부한다. 다만 그것들은 일상이 틀어지는 순간, 감정이 격해지거나 잦아드는 상황 안에서 새로운 감각을 포착하는데 몰두한다. 이러한 감각은 작업을 이루는 다섯 명의 퍼포머에 의해 실현되기도 하지만, 퍼포머와 관객의 조우를 통해 구축되기도 한다. 그 정념의 체험에는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 대한 물음/의심/허무가 자리한다. 앞서 말했듯 박승원의 퍼포먼스는 언어로 환원 불가능한 감각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하여, 우리는 그 감각을 명징한 상징으로 읽는 대신 오독과 연상에 기대어 다섯 퍼포머의 분노, 슬픔, 애도, 즐거움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감각과 관계한 현실을 간과하고 작업을 보는 것은 작업의 표면만을 인식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작업을 관통하는 ‘미지의 징표’에 응답하기 위해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배회하는 개인과 타자, 그 밖의 온갖 것들의 결을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작업을 보면서 체제의 논리에서 배제된 것들을 살피도록 하겠다.

불가능한 말
박승원의 개인전 <코리안 그루브-유연한 몸부림> 박승원의 개인전 <코리안 그루브-유연한 몸부림>(2017)은 2016년 아마도전시공간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유연한 몸부림>(2016)을 영상과 설치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아마도전시공간에서 갤러리 구로 이동해 그간 실험한 신체성/즉흥성/관계성을 새로운 형식으로 담아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에는 방향을 잃은 말들이 부유한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를 반복하는 독백이 있는가 하면, “들어오세요. 해치지 않아요.”하는 환대의 목소리도 있으며,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외침도 들린다. 또한, 거기에는 언어의 모양을 갖추지 못한 중얼거림도 있으며, 언어를 대체하는 침묵도 흐른다. 이는 고립된 공간에 갇힌 다섯 퍼포머가 내는 말들로 정확한 맥락이나 배경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불안정한 발화를 통해 현실에서 추방되거나 방치된 이미지(사건)를 불러들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령 바닥에 분필로 고통을 각인하는 남자는 ‘세월호 참사’를 온몸으로 앓고 있는 듯하다. 그는 문지방에 선 채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제스처를 취하거나, 하반신이 없는 마네킹을 안고 춤을 추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그의 말은 말이라기보다 ‘울부짖음’에 가깝다). 그러한 남자 뒤에는 영상 영상은 작가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광화문, 대학로, 시청 등으로 옮겨 다니며 그 시간의 흔적을 수집하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고백하는 또 하나의 작업이다. 이러한 기록은 은폐되고 왜곡된 ‘공식적 기록’과 맞서 싸우는 실천적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은 상처를 보듬기 위한 의식(ritual)이기도 하다.
이 틀어져 있는데, 그것은 형체가 희미할 뿐 아니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현란하게 흔들리는 바람개비, 가습기의 모터 소리,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에 둘러싸여 관객의 시선을 붙잡지 못한다. 결국, 소리에 불과한 남자의 말과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영상의 메시지는 말이 되지 못하고 휘발돼 버린다. 이러한 비극적 장면은 야외공간에서 다른 퍼포머들의 말을 실어 나르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 퍼포머의 상황과도 맞물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맹목으로 신을 찾는 그의 말들은 사실 다른 퍼포머들은 물론이고 그의 의지와도 무관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무전기의 음성을 텍스트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의 예상치 못한 오류로 인해 전송되는 모든 말이 특정 신앙을 표방하는 말로 변환된 결과다. 그러니 하나님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셈이다. 이러한 광경은 말하는 입이나 듣는 귀나 죄다 먹통이 돼버린 소통 부재의 현실을 환기하는 동시에 다중의 목소리를 손쉽게 처리하는 권력의 이미지와도 겹쳐진다. 한편, 다른 퍼포머들의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처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항변할 수도 없는 퍼포머는 그 불가능한 말들을 가능한 형태, 즉 즉흥극으로 지켜낸다. 그것은 이미 ‘망한’ 현실임에도 성실히 살아내겠다는 주체의 비장한 각오처럼 보인다. 그렇게 그는 혼란과 수렁 안에서 곤혹감과 불안감을 겸허히 수락하며, 그의 말처럼 “자유의 의미로” 나아간다.

현실 속 ‘다른’ 현실들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나머지 퍼포머에게도 나타난다. 전시 기간 동안 개인 공간(전시장)이 주어진 퍼포머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거나, 자신의 일상을 관객과 공유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작가로부터 지시받은 행위를 개방된 공간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과 욕망이 개입되는 사생활이란 실체와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퍼포머들은 자신이 아는 자신을 지우거나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구성’하게 된다.
다락방을 배정받은 퍼포머는 단절을 통해 삶을 실감한다. 그녀가 머무는 다락방은 물리적으로 폐쇄돼 있을 뿐 아니라 관객과의 접촉도 금지된 공간이다. 퍼포머는 관객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관객은 그런 퍼포머를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한다. 그들은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실제로 다른 전시 공간보다 다락방에 들어선 관객의 표정은 다소 경직돼 있으며 행동 또한 어색하다. 반면, 퍼포머는 천연덕스럽게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유희는 상징적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쾌락이다. 때문에 그녀의 행동에서 서사나 재현, 의도나 목적을 찾는 일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녀의 유희를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방, 여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긴 천을 목에 두르고, 방울이 달린 팔찌를 손목과 발목에 찬 채 춤을 추며 걸어 다닌다. 그녀는 스티로폼 상자를 두드리거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페트병을 밟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 페트병 찌그러지는 소리, 스티로폼 상자가 긁히는 소리가 뒤섞인다. ‘연주’를 마친 그녀는 스티로폼 상자를 뒤집어 붓으로 색을 칠한다. 어느덧 그녀는 우비를 입기 시작한다. 우비를 입은 채 카트에 올라가 천장에 그림을 그린다.

이렇듯 그녀의 말은 의미가 아니라 운동의 형태로 구현된다. 그것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희구하는 몸짓과도 같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아마 퍼포머도 전시장 밖에서는 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다락방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전부 현실 안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관객이 느낀 이질감과 불편함, 난잡함과 생경함은 사실 우리의 (무)의식적 열망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박승원은 이러한 ‘카오스’의 상태를 어떤 절대적 가치로 보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우리의 정신/감정/사유를 완벽히 구사하지도 못할뿐더러 끊임없이 비틀리며 왜곡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는 언어에 속박된 삶에서 오는 결핍과 불만,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다채로운 리듬, 무질서한 이미지, 이야기가 없는 극을 작업에 투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퍼포머/작가가 보여주는 분열적인 행위는 언어라는 고립과 대면하는 개인의 묵묵한 투쟁이라 봐도 되지 않을까.
다락방 퍼포머의 일상이 단독적 유희라면, 중앙 홀 퍼포머의 경우는 관계적 유희라 할 수 있겠다. 전시장에는 사다리, 의자, 나무 선반, 아이스박스, 밥상, 체중계 등 그녀가 올라설 수 있는 크기의 일상용품들이 놓여있다. 퍼포머는 관객이 지정하는 사물과 경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수동적 위치에 놓인 그녀의 일상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제약적이고 위험한 상황을 찬찬히 뛰어넘는다. 가령 처음에 관객은 퍼포머의 ‘묘기’를 기대하며 그녀가 올라 설 사물들을 마구잡이로 고른다. 퍼포머는 그런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사는 곳을 물으며 관객이 지시한 사물 위를 오르내린다. 그러다 관객의 주문 사항이 자신에게 무리다 싶으면, 퍼포머는 “저 저기까지 날 수는 없어요.” 하며 웃으면서 양해를 구하고 관객과 이동 경로를 협상(창안)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관객은 그녀와 교감하며 나중에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선택을 바꾸거나,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기도 한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를 보호하고, 배려하고, 웃으며, 고립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지하층의 퍼포머는 이보다 더 현실적인 고립에 배치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온종일 노동을 한다. 광고지 돌리는 일을 전시장(자유가 허락된 공간)에서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지만 익숙하다. 우리가 마주한 그 황폐한 상태는 잘 알다시피 삶의 일상적 형상이다. 그러나 광고지를 나르고, 배열하고, 붙이는 그녀의 동작은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 가령 그녀는 바퀴 달린 기구를 타며 광고지를 자르거나, 잘린 광고지를 뭉쳐 산처럼 쌓기도 하고, 광고지를 붙일 복도를 다양한 보폭으로 걸어보거나, 창틀 위에 올라가 광고지처럼 부동의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그것은 되풀이되는 기계적 일상 속에서 ‘살아 있음’을 자각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녀는 ‘전단 알바’에 사용되는 근육, 기울기, 빠르기, 자세를 총동원해 자신의 몸이 감당해야 했던 감각들을 전시장에 늘어놓는다. 강압적인 노동이 자발적인 기예가 되는 그 행위는 노동과 놀이, 일상과 예술,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끔찍한 현실을 재배치한다.

이처럼 우리는 <코리안 그루브-유연한 몸부림>에 등장하는 다섯 퍼포머의 극적인 상황에 관여하지만, 끝내 그들의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하고 전시장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편적 이미지, 기묘한 움직임, 의미(로 묶어 낼 수) 없는 순간들을 목격하며,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여기를 계속 들추게 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껏 본 적 없는 (과잉과 결핍으로 응집된) 고유한 개체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섯 퍼포머가 그려내는 (비)현실적 풍경 안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와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유연한 몸부림’-발악과 침묵, 체념과 유희, 대화와 기예-은 우리의 소명이 된다. 요컨대 그것은 주체로서 존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현실 안에 거주하기 위한 삶의 혁신이다.